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리마스터판 어른들이 꼭 봐야되는 명작 잔혹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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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리마스터판 어른들이 꼭 봐야되는 명작 잔혹동화
감상평 1
분위기를 보니 그럴것같은데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리마스터판 어른들이 꼭 봐야되는 명작 잔혹동화
감상평 2
2000 년 역사 동안 성경을 불사지르고 엄청난 핍박이 있어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문 닫는다고 하나님이 돌아가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감상평 3
예언에 따르면 먼 훗날 개신교만이 아닌 모든 종교가 문닫는 날이 올거라 압니다. 대신 세상을 장악하고 내가 신이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죠 그렇게 종교 갖기 싫어 하는 사람들도 어쩔수 없이 섬겨야 하는 자가 나타난다고 할수 있죠 왜 섬겨야 하냐고요? 안섬기면 밥도 안주고 죽겨버리니까요 사탄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카톨릭도 무너지고 개신교도 무너지고 모든 종교가 다 무너지는 것으로 압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그자 즉 사탄을 신으로 섬겨야 하는 날이 오죠 그날에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참는자는 복이 있다 하여이다.
감상평 4
분명히 위기는 위기입니다.이럴 때 일수록 개신교 목회자들과신자들은 하나님께 통렬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감상평 5
천주교와 개신교는 같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한 형제입니다.단지 운영방침이 다르고 영업 노하우가 다를 뿐입니다. 천주교도 로마에서 타락 되여 율법과 복음울 믹스했으며오리지날 초대교회와 동떨어진 교리로 제사예식을 차리며양때를 돌보는 목자를 신을 모시는 신부로 존칭했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 받은 초대교회와 같이깨끗이 보존된 교회라고 볼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리아신앙으로 많이 정화되여 지곤 있으나고쳐야 할것들이 아직도 많이 산재(散在)하고있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개신교는 개인사업을 하다 보니 교회 성장이 우선이 되고돈에 얼룩져 많은 세상 사람으로 부터 지탄 받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가만히 지켜 볼수 밖에 없는 것이 무지한 교인들이 새로운 생명떡 먹기를 꺼리며달콤한 오래된 만나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와 생명떡을 함께 먹으면 배탈이나 병들어 눕게된다는 것을예수께서 미리 경고하셨기에 우리는 길잃은 양들 보다딴길로 인도하는 목자들에게 선의에 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TV를 보면 목사님들의 설교가 하나같이 역사와 결과와간증 뿐이며 하나님의 도를 진리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 즉우리이 영에 생명을 불어넣는 복음서 안에 있는 예수님의 본과가르침의 말씀은 전혀 들을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국민들은 허황된 개신교 교리 못믿겠지요?개발도상국 국민들이나 미개한 나라의 국민들이라면 모를까?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리마스터판 어른들이 꼭 봐야되는 명작 잔혹동화
감상평 6
유럽교회 사라지다, 뉴스동영상.http://onnurips.org/bbs/board.php?bo_table=board_06_01&wr_id=114 의식이 깬 선진국
감상평 7
님의 안목이 놀랍습니다^^ 천주교니 개신교니 하는 기독교계열의 주식회사의 생리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곳은 모조리 문을 닫게 됩니다다만 하나님의 말씀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를 이룰 수 있는 사람즉 예수님의 마음인 '낮아짐과 비움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마음의 법인 성령의 법에의해서 하나같이 황충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남기신자 아니면  자기들의 영이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황충의 먹이가 되어 흙으로 사라질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도'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요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이 무너졌을때....캄캄한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때에 다음 세상을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도'의 가르침이 있는 전도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서1장]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무수한 세대가 인생을 ‘덧없다.’ 하고 갔다. 그러나 나중에 오는 세대도 이전세대 사람들의 그 말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인생에 무엇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다가 그들 또한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하고 간다.그 인생들이 살다간 땅은 언제나 그대로 있고 이처럼 인생들은 다만 그 땅위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갈 뿐이다.많은 세대의 반복적인 경험담을 귀담아 듣는다면 그 헛된 것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땅은 여전히 있는 것일까, 땅은 무엇을 위해 존재 하는가 , 그 땅이 존재하고 또 내가 그 땅 위에 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인생은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를 산다.  해가 뜬 어떤 날 나고 또 난 날과 같은 어떤 날 온 것처럼 간다. 그래서 사람은 왔는가 싶더니 가는 인생이기에 세월이 빠르다고 느끼며 인생 중에 하던 것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옮기는 것’의 의미로 쓰인 용어다. 사라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부지중에 사라지며 그 사라짐을 만드는 바람은 많은 곳을 다니다가 처음 난 곳으로 다시 가고 또 나오기를 반복한다.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강물이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뜻하는 용어이며 바다란 세상이다.) 어느 곳으로란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들려지거나 보여 지든지’ 라는 말이고 ‘그리로 연하여 흐른다.’는 말은 세상의 인간들을 향해 외쳐지고 있다는 말이다.강물이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는 말은 아무리 말씀을 세상에 외쳐대도 세상에 말씀이 충만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악하여 말씀을 받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복하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인생들 앞에 있다. 그래서 만물은 피곤하다. 창조하신 만물을 피곤하도록 까지 놓아두시며 하나님의 창조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기 바라며 기다리고 계시지만 인간들은 자기들의 머릿속에서 그 답이 찾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기의 눈과 귀의 만족을 위해 오늘도 밤을 지새우며 찾기에 골몰한다. 그 골몰함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피조물이 조물주의 생각을 궁리한다고 알 수 있을까?만물이 존재하는 목적을 아는 것은 창조주뿐이다.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리마스터판 어른들이 꼭 봐야되는 명작 잔혹동화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은 만물이 존재하는 것에 목적 있다는 것이다.만물의 조화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깨닫지 못한다. 만물의 존재목적을 설명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누가 뭐라고 하던가? 증명이 되던가? 아무도 증명할 수 없고 아무도 존재이유를 명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수없이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당신이 있기 전에 존재하던 것들이다. 당신이 사는 세상에서 새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고 있는 그것은 이미 있던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이지 새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해 아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땅에서 나온 것이다. 과학적인 사고를 동원하여 생각을 해보라. 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있는가? 없다. 모든 것이 땅에서 온 것이기에 모든 것이 또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4대조 할아버지를 본 일이 있는가? 없다. 그들을 본적이 없는데 당신은 지금 있다. 그것과 같이 당신의 4대 후에 오는 당신후손의 머릿속에 당신은 없다. 당신은 그저 스스로 존재를 느끼고 살아있는 지금만 있는 것이다.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인생들이 미련하여 앞 세대가 살다간 인생을 살면서 이미 살다간 앞 세대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대는 여전히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다가 또 다시 ‘허무하다’ 말하고 간다.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이미 있었느니라.❧  장래의 세대를 이미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사람의 의식 안에서는 순서가 있으나 하나님의 견지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성을 갖는 다는 뜻이다.창조를 사람이 이해할 수 없듯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성을 갖는 다는 이 말씀도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인식하여 사고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찰나의 일이며 또한 나의 존재이유와 내 주변의 모든 환경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그것이 만물이 존재하고 인생이 낳아지고 죽어가는 이유의 전부인 것이다.  세대가 반복되듯이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은 또 세우시고 인간은 또 무너뜨리고....를 반복하며 하나님께서는 남겨진자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을찾으시는 섭리의 진행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은 성경에 나와있는 그대로 입니다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이땅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처음이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좇는자가 아니면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아들이자 예수님의 형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세 복음서에서 동일하게 말씀을 하셨으니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실 것입니다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막8:34],[눅9:23]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그리고 또 한번 다짐을 하셨습니다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위에 열거한 성경구절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이 들은척 만척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그러니 이 세대의 어느곳에 하나님의 법이 살아 있겠습니까?목회자도 모르고 신부나 수녀도 모르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는 자기부인의 길'을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택하신 자....부르신 자.....마음을 열어 주신 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성경을 바르게 보고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2장]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마음은 '낮아짐과 비움'의 마음입니다우리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인 '낮아짐과 비음'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며 세상을 향한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이런 모든 방법과 절차가 기록된 것이 마음의 법인 '성령의 법'이며 '하나님의 도'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가 무엇이며 우리 사람의 마음을 청결히 할 수 있는 마음의 법인 '성령의 법'이 성경에 있다고 하는 데 그 법이 어디에 있냐고 가까운 목회자나 신부나 수녀에게 물어보십시요그들이 만약 알고 있다면 제가 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과는 서로 반대 방향에 있으며 세상을 향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등져야하고 하나님을 향하는려는 사람은 세상에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 원리를 그들은 성경과 반대로 전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법인 '하나님의 도'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5장]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지금의 교회나 성당은 성경에도 없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를 하고 성경의 말을 왜곡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는 천국에 간단다...하는 말이 대표적이 거짓말입니다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2장21절] 예수님은 세상을 악하다 증거하시고 세상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그리고 성경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신길을 본 받으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을 하지않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지금 교회나 성당이나 그외에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어느교단이나 종파를 떠나서 아무곳이든지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보고 그 가르침을 받아 보겠다고 질문을 던져 보십시요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자기부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법인'성령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며 '성령의 법' 자체도 제목만 겨우 알 수 있을 뿐 전혀 감을 잡지 못 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어찌 하는지 모른다고 할 것이며 사람은 예수님처럼 할 수 없다는 대답만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일 뿐이며 제가 안다고 교만하거나 거만한 것이 아니고 그저 있는 그대로 정직히 전하는 것 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하여드립니다 다만 저는 전하는 우체부의 역활만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19장]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 사람도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가신길을 행할 수 있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에 다다를 수 있고 마음의 흠을 지우고 청결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뵐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그렇게 이 세대의 사람은 먼저 된 그들에게 속고 속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삶을 살 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님이 말씀하시는 기독교의 문은 반드시 닫혀 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다시 세우시고 세상은 다시 하나님의 법을 무너뜨리는 역사를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세대는 반복되는 것입니다여기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영적인 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과  한 세대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의 인식 범위가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섭리의 진행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세대의 진행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아울러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으시려면 네이버카페 '에끌레시아'를 찾으십시요   
감상평 8
분명한 사실인 것은..교회의 수나 신도들의 수,, 확연히 줄어가고 있습니다.빠른속도로..왜 그럴까요?사회가 악해서,,?   사탄의 지배..?이런 헛소리를 하게 된다면 더 빠른 시간에 줄어 갈 것이고..종국엔..몇 안되는 광(?)신도만이 남게 되겠지요.. 성장우선주의..물질 만능주의..기복주의..번영주의..성공제일주의...그런 과정속에서 벌어진 왜곡과 기만...비 성숙한 신학의 토대위에서 단순한 열정만으로 저질..목회자가 대량생산 되는 곳..사회에서 보통의 지식이나 인성에도 못 미치는 목회자들의..눈살 찌푸려지는 몸 부림들..신학적 고민의 흔적과 거리가 먼...종교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행위와 행사... 신앙이 반드시 이성과 지성의 범주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하느님은 사람을 빚을실때..당신을 닮게 빚으시고..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인간은 이성과..지성과 통찰을 갖게 되었습니다.과학과 인문학적 지식 수준은 눈분신 발전을 하고 있는데..교회의 행태는 ..... 뼈를 깍는 자성과 노력이 없이는..맹목적인 기도만으론..어쩌면 유럽보다더 급속한 몰락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나마 유럽은 이천년 가까이나 그들의 생각과 문화의 바탕으로..기독교가 있었고. 아직도 존재하며  탄탄한 신학적 연구와 정립위에도덕적으로도 인문학적 수준으로도 ,,사회적으로 늘 존경의 대상이 되는[성직자]- 영국에선 역대 설문조사에서 존경받는 직업 으로 [성직자]가삼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하더군요 그과정도 우리가 상상치 못할 정도로엄정하며 어렵다고 하고-들이 있는 반면에..우리에겐..짧은 역사속에제대로 신학을 받아 들이기도 전에..혼합주의로 물들어 버린 경우가 허다해서..  다 없어지고..제대로 된 교회 몇몇이 남는 것이..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군요.. 
설교를 듣게 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 마이크를 쓰면 되고, 소리가 작으면 볼륨만 조금 키우면 된다. 너무 멀어져서 목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TV화면을 통해서 목사의 얼굴을 소리와 함께 전송하면 된다. 메가 처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초대형 스크린은 목사의 얼굴을 얼마든 크게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수만 명이 운집하는 돔형 실내 체육관에서도 천정에 매달린 4면 대형 스크린으로 얼마든지 목사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자 테크놀로지는 메가 처치를 본당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메가 처치는 본당을 넘어선 교회다. 부속실로 전자 신호를 송출하여 본당 밖에서도 얼마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성 송출을 통해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집에서 편안히 클릭 한 번으로 인터넷 화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전자결제 계좌로 헌금을 송금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쯤 되면 메가 처치의 외곽 경계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메가 처치는 규모 때문에 불가피하게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한다. 규모가 작으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테크놀로지 의존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메가 처치는 테크놀로지 의존적인 교회다. 부속실에서 TV화면으로 예배를 보는데, 갑자기 음향시스템이 문제가 생겨서 소리는 안 들리고, 그림만 보이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런 경우 예배는 엉망이 되고 제대로 드려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메가 처치가 얼마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이다. 그러니 메가 처치는 실상 테크노 처치(techno church)인 셈이다.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기계장치나 장비가 아니다. 테크놀로지란 자크 엘룰(Jacques Ellul)에 의하면 '목표하는 바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의 총화'다. 이런 점에서 테크놀로지는 정신의 문제요, 태도의 문제며 나아가 그 자체가 하나의 영성(spirituality)이다. 메가 처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전부 테크놀로지다. 행정기술, 조직기술, 경영기술 등 무진장한 테크놀로지가 교회를 유지·관리·성장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선전(propaganda) 테크놀로지다. 세속적인 광고 기법, 심리학적 발견, 통계조사 방법 등을 도입한 설교·교육·예배는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개가다. 테크놀로지를 소유한 메가 처치는 마음먹은 대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다. 초단위, 분단위로 계획된 큐시트로 컨트롤되는 메가 처치의 예배는 원하는 시점에, 목표하는 만큼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시점에 78%의 청중을 울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메가 처치 안에는 테크놀로지의 영이 운행하고 있다. 참으로 메가 처치는 테크노 처치다. 4) 시장 경제의 출현 메가 처치의 출현이 가능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18~19세기에 서양에서 출현한 매우 특이한 경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의 여러 특징이 있겠지만 본 논의와 연관해서는 자본주의가 시장 경제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시장 경제의 원리는 단순하다. 판매자가 상품을 시장에 내다팔면 소비자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 이것이 시장 경제의 원리다. 사실 이것은 그다지 새로운 원리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고, 사고하는 시장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출현한 시장(market)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시장이다(최소투자로 최대이익 창출을 위해 오염ㆍ재해ㆍ복지 등의 사회적비용은 외부 사회와 국가와 개인에게 전가). 시장 경제란 바로 이 자본과 시장의 자율성을 신뢰하는 경제 시스템이다(신 자유주의 FTA : 대자본의 자유로운 무역에 관한 협정). 과거의 자본과 시장은 독립적일 수가 없었다. 과거 시장의 질서는 왕이나 국가와 같은 수없이 많은 외부 세력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간섭과 제재를 받아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자본과 시장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장의 질서는 왕이나 국가가 아니라 시장 자체가 스스로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어졌다. 시장에 맡겨 두면 시장이 알아서 질서를 세우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시장에는 여러 판매자가 물건을 내다 팔고, 또 여러 소비자가 물건을 사려고 할 것인데, 이들의 판매 경쟁과 소비 경쟁이 저절로 합리적인 가격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방임해 둔다면 시장은 판매와 소비,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서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는 믿음, 더 나아가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개입한 것이라는 믿음이 19세기에 출현한 시장의 특징이다(부작용 : 독점ㆍ과점 대자본의 횡포). 이 시장 경제의 원리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중요한 원리다. 놀랍게도 메가 처치는 이 시장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메가 처치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시장 상황이 도래했다. 오늘날 교회는 시장에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와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판매하도록, 그리고 그 신앙을 구매하도록 설득당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여러 판매자들이 상품을 시장에 내다 놓으면, 소비자들이 쇼윈도 안의 상품을 원하는 가격에 구매하듯이,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판매하고 또 구매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 이 채널 저 채널 재빨리 이동하는 채널 하퍼(channel hopper)처럼 손쉽게 기독교 시장에서 구매 상품인 교회를 옮기는 처치 하퍼(church hopper)족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과거에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회가 신자를 선택했지, 신자가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는 시장에 나와 있는 여러 교회들 중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메가 처치는 시장에서 판매 경쟁에 성공한 교회며, 소형 교회는 판매 실적이 부진한 교회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크든 작든 모든 교회는 종교 시장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유경쟁 시장의 원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결국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모든 교회는 마켓 처치(market church)다.  Ⅱ. 교회 크기에 목매게 된 역사 (1) 본 연재글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는 메가 처치 현상이 2000년 기독교 역사상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메가 처치는 20세기의 산물이며, 그 현상은 대단히 최근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메가 처치의 뿌리는 상당히 옛날까지 뻗어 올라가 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교회는 ‘크기’에 눈을 뜨고,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가능케 한 교회 내부의 동인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교회가 크기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추적해보고자 한다. 1. 규모에 대한 무관심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야만인들의 개종이 있은 후, 1000년이 넘도록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었기에 교회의 규모가 역동적으로 증가하는 현상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초대 교회 때부터 시행한 것으로 보이는 교구제 덕분에 개교회가 갑작스럽게 비범한 성장을 보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또 많은 목회자들은 숫자나 규모의 지나친 관심을 세속적 허영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체로 규모는 진리에 비해서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2. 18세기 대부흥운동: 규모에 눈을 뜨다 그러다가 18세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대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을 강타한 1차 대부흥, 혹은 1차 대각성 때 교회는 점차 ‘규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여러 가지의 개혁과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숫자’와 ‘규모’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영국 국교회 내에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두게 했다. 메마른 설교와 교리 교육, 형식적인 예배에 지쳐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던 대다수 교인들이 어스킨(Erskine) 형제로부터 시작하여, 휫필드(Whitefield), 웨슬리 형제(Westley)로 이어지는 위대한 부흥설교가들의 설교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이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교회당은 이들을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최초로 야외에서 집회를 열게 된다. 한번 상상해보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와서 야외에서 집회를 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하늘로부터 무한한 성령의 은혜의 소낙비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아직까지 이런 역사는 한 번도 없었다. 놀라운 흥분과 감격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교회는 처음으로 숫자와 규모에 눈을 뜨게 된다. 3. 조지 휫필드의 착각: 규모를 하나님의 역사로 혼돈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꼽히는 휫필드의 미국 사역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회의주의자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마저 그의 설교를 듣고는 고아원을 위해서 전액을 헌금하고 말았다니 말이다. 프랭클린이 참석했던 집회에 모였던 청중의 숫자는 자그마치 3만 명이나 되었다. 규모면에서 1차 대각성운동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으라면 휫필드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휫필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숫자와 규모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와 신념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그는 ‘숫자’와 ‘규모’에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또 자신의 집회에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한 기술적 방법을 적극 개발했다. 이안 머레이나 마이클 호튼 같은 이들은 참 부흥(revival)이 거짓된 부흥주의(revivalism)로 타락하게 된 것은 알미니우스의 신학 때문이라고 하지만 최초로 숫자를 통한 부흥을 추구했던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신학적으로 휫필드는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복음전도의 ‘효과’(effect)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첫 번째 대표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주로 야외에서 이동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교회로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 가운데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구도자 중심의 집회’를 한 것이다. 그는 집회를 열기 며칠 전에 스태프들을 미리 보내서 장소를 확보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분위기를 조성하며, 신문 광고, 설교문 배포, 풍문 조성 등을 통해 휫필드 집회에 기대심을 높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휫필드의 영웅적 면모는 각별히 부각되었다. 전형적인 스타 시스템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휫필드는 집회와 예배에 광고와 선전을 활용했다. 집회의 방식도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동시대의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방식은 이미 쓰인 설교문을 설교단에서 읽는 원고설교였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반응은 에드워즈의 관심의 초점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선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달랐다. 그는 배우 출신으로서, 자신의 말과 억양·얼굴표정·몸짓을 적절하게 연출할 줄 알았다. 거대한 군중 앞에서 원고 없이 즉석으로 자유설교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ex tempore) 설교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들고, 발을 구르고, 성서의 이야기를 몸으로 극화하고, 큰 소리로 우는 등 온 몸으로 설교했다. 또 그는 사람들의 양심을 향해 직접 공격했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에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말만해도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휫필드가 ‘숫자’와 ‘규모’를 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휫필드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 휫필드가 이렇게 ‘규모’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선한 목적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모든 메가 처치의 목사들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사역했던 대중 운동가다. 대중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알았던 휫필드는 근대 거인주의의 시조로서, 카리스마적 종교 지도자의 모범이요, 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원천이다. 4. 노천 캠프 집회와 시장 상황의 개막 휫필드와 웨슬리의 야외 집회는 무엇보다 교구제의 파괴를 가져왔다. 야외 집회를 소개받았을 때 웨슬리는 처음에 주저했으나 ‘영혼 구령’이라는 지상 과제 앞에서 결국 마지못해 수용하고 만다. 그리고 웨슬리는 말했다. “전 세계가 나의 교구다!” 이제 기성 교회가 임의로 잘라 놓은 교구는 새 시대에 새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져야 하는 낡은 장벽이었다. 교회의 질서는 새로운 운동에 의해서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 이때부터 교구제는 급속히 무너져갔다. 미국의 부흥운동가들은 노골적으로 견고한 교구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19세기 이후 미국에서 노천 캠프 집회는 상당히 대중화되었는데, 캠프 집회가 교회당이 아니라 야외에서 열렸기 때문에 부흥운동은 기존의 지역교회 구도를 벗어나 있었다. 캠프 집회에는 불신자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부흥사들은 이들의 마음을 도둑질했다. 솔직히, 신자들이 볼 때에도 기존 교회 목사들은 교구제의 보호 아래 안일하고 나태하며 영적으로 무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부흥운동가들은 뜨겁고 능력이 충만하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만 들고 전진하는 하나님의 참 종처럼 보였던 것이다. 때문에 집회에 참석했던 신자들은 참 지도자를 찾아 교회를 옮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소위 ‘수평 이동 현상’이 이때 이미 발생한다. 대다수 부흥사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조장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 목사들을 비판하며, 회심조차 체험하지 못한 목사를 과감히 떠나라고 했다. 은혜가 없고 메마르고 능력이 없는 목사를 떠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부흥설교가들에게로 가라고 신자들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부흥운동에 소극적이었던 회중교회·성공회·장로교는 교세가 추락하고, 운동을 주도했던 감리교와 침례교는 급성장했다. 이로써 바야흐로 능력과 실력 위주의 목회 시장이 열린 것이다. 부흥운동은 새로운 교단을 출현케 했으며, 수많은 기존 교회와 교단을 갈가리 쪼개 놓았다. 교단이 많아지면서 신자들의 교회 선택의 폭은 점점 더 넓어졌다. 선택권은 점차 교회에서 신자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야흐로 시장 상황이 열리고 있었다. 부흥사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장 상황 속에서 신자들은 점차 고객이 되어가고, 교회는 기업이 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5. 챨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 1) 새로운 방법(new measure) 19세기 2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교회가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획기적이고도 정교한 방법론까지 교회에 제공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을 ‘새로운 방법’(new measure)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방법이란 부흥을 이루는 방법을 말한다. 부흥이란 크고 놀라운 역사로서 규모가 비범하게 크다는 것이 핵심이다. 죄인들의 회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회심이 ‘많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부흥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은 언제든지 적절한 수단과 방법만으로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피니의 부흥론의 핵심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죄인을 회심시키기 위한 부흥의 방법이 새로운 방법인데, 새로운 방법은 무엇보다 대중 집회가 필수적이다. 큰 교회 건물이 없으면 시청이나 학교 강당을 찾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노천 캠프 집회를 열었다. 이곳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다음,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즉시’ 회개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위해서 피니는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들을 동원하였는데, 환풍기를 조절하고, 음악을 신중하게 활용했으며, 그 외에도 예배의 순서를 갑자기 바꾸기, 예배를 연장하기, 거칠고 통속적인 말을 사용하기, 기도와 설교에서 개인의 이름을 거명하기, 예배 시 설교단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질문하기 등이 그 예다. 무엇보다 피니는 집회의 효과를 구체적인 척도로 측정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전부터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했던 ‘제단 초청’(altar call) 방식을 적절히 변형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도 좌석’이다. 집회가 끝날 때쯤 피니는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맨 앞에 비워둔 의자, 곧 구도 좌석에 앉게 했는데, 이것으로 그는 회심자의 숫자를 계산할 수 있었고, 집회의 효과를 숫자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집회의 목표는 구도 좌석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수의 사람들을 앉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강렬하고 응시하는 듯하며 짜릿한 느낌을 주는, 미친 듯한 예언자의 눈으로 청중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이름까지 호명하며 회개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지금 즉시!” 회심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소리쳤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고 협박했다. 청중들 사이사이에 앉은 회개를 돕는 스태프들은 죄인들이 결단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그들이 결단하고자 일어설 때 즉시 그들을 구도 좌석으로 인도했다. 이러한 방식은 직업적 부흥사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어떤 목사는 시계를 꺼내들고 “15분 안에 회개하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2) 오직 부흥으로 피니에 와서 부흥은 이제 절대적인 것이 된다. 부흥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피니의 주장이었다. 피니는 자주 신자들에게 이렇게 위협하곤 했다. “지금 당신이 그를 돕는다면 그가 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영혼의 피 값을 누구에게 찾겠는가?” 수많은 영혼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구하는 것, 이로써 거두어지는 부흥, 이것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말하는 부흥이 ‘숫자’와 ‘규모’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라는 데 있었다. 결국 그는 숫자와 규모가 전부라고 말한 셈이었다. 이로써 피니는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향한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를 닦아 놓았다. 3) 부흥 테크놀로지 “부흥을 일으키고 싶어도 안 되는걸 어떡하냐?”라고 피니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부흥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아니면 부흥을 원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피니는 최초로 방법만 올바르면 결과는 자동으로 얻을 수 있다는 테크놀로지의 원리를 복음 전도에 적용한 사람이다. 피니의 부흥론은 사실 테크놀로지다. 피니에 의하면 신앙이나 회심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부흥은 ‘기적’이 아니라 정확한 ‘과학’이다. 부흥이란 ‘자연의 힘을 옳게 사용’하면 언제나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그는 말한다. “부흥은 결코 기적도 아니며 또 기적에 의존한 것도 아니다. 부흥은 당면한 수단을 옳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농사 수단을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농부는 풍작을 거둘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방법이 옳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부흥만 이루면 과정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오늘날 대다수 메가 처치 목사들의 전형적인 목회철학이다. 4) 표지로서의 부흥 부흥이 만일 과학이고 테크놀로지라고 하면 이제 누구라도 부흥을 이룰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그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자나 교회가 문제라는 말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데도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나 신자가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나 교회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흥은 신자나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표지가 된다. 부흥을 일으키는 신자나 교회는 건강하지만,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신자나 교회는 병들었거나 죽었다. 부흥은 신자나 교회, 특히 목사의 책임이다. 부흥을 일으킬 줄 모르는 목사는 무지하거나 나태한 목사다. 피니와 함께 부흥, 곧 규모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6. 무디와 이벤트의 시작 19세기 말, 또 한 명의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나타났다. 드와이트 무디(Moody)다. 무디는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수십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쓰임을 받았다. 무디는 새로운 복음주의자의 모습을 창조했는데, 그것은 ‘오직 열정만으로’ 영혼 살리는 일에 올인(All-in)하는 전도자의 모습이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영혼 살리는 그 한 가지 일에 자신의 전 인생을 기꺼이 헌신했다.무디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신학이 약했고 지식이나 논리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했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열정만 있으면 되고, 지식이나 학문은 필요 없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신학과 현대 과학을 불신앙으로 비난했으며,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 문자지상주의)과 같은 근본주의 신앙에만 헌신하도록 촉구했다. 오직 열정만 강조하는 무디와 함께 사고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점차 만들어졌다(부작용 : 교회란 뭔지..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뭔지.. 믿음이 뭔지.. 이런 기본개념의 부재로 예배당을 교회로 착각한 채, 봉사ㆍ헌신을 교회건물에게 드린 눈먼 믿음을 신실한 신앙으로 왜곡). 무디의 열정주의는 더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도를 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그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이것은 정확히 피니의 정신과 일치한다. 그러나 무디는 피니보다 훨씬 덜 지성적이고, 대신에 더 감성적이라는 점이 달랐다. 피니처럼 무디에게도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이렇게 해서 무디식 이벤트 전도 집회가 탄생한다. 무디는 논란이 많은 피니식 ‘구도 좌석’은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심한 영혼들을 초청하는 방식을 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고 세련된 이벤트로 만들었다. 무디는 호통을 치거나 꾸짖는 대신 솔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을 내보이며,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메시지가 끝나면 모두 조용히 기도하게 했다. 그러면 파이프 오르간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기 시작한다. 음악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잠시 뒤 집회 전문 가수인 아이라 생키(Ira Sankey)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라, 지치고 상한 자여, 집으로 오라.” 생키의 노래할 때 잘 준비된 백 코러스가 중간 중간 화음을 넣어준다. 속삭이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코러스는 “집으로 돌아로라, 오라, 오! 집으로 오라”를 반복한다. 집회장은 숙연해지고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회심자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면 스태프들은 그들을 준비된 장소로 인도한다. 이러한 무디의 전도 집회는 정확히 오늘날 메가 처치의 이벤트성 집회의 원형이다. 7. 빌리 그래함과 테크노 복음주의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부흥설교자 빌리 그래함은 LA의 천막 집회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도 휫필드 이후의 복음주의자의 계보를 잇는다. 그는 선조들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20세기의 테크놀로지와 잘 버무려 테크노 복음주의(Techno Evangelism)를 완성한 사람이다. 애초에 3주를 계획했다가 극적인 성공으로 9주까지 연장된 천막 집회에 빌리 그래함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 회심한 조직 폭력배 등을 게스트로 참석시켜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후 빌리 그래함의 전도 집회는 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피니의 3만 명 집회도 1974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엑스폴로 74대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주최 측은 이때 158만 명이 모였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러한 대형 집회가 가능한 것은 전자 테크놀로지 덕분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대중 매체의 위력을 잘 알고 그것을 적극 활용한 미디어 복음주의자다.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 <불타는 세계> 등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했으며,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결단>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영향력을 배가했다. 또 ‘결단의 시간’ 등과 같은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인도해서 전 세계 2500만 명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또 영화를 제작하고, TV에 출연했으며, 다양한 영상물을 사역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위성중계를 통해 전 세계 수억 명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빌리 그래함과 함께 모든 ‘규모의 장벽’이 무너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디서나 복음전도자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기독교 하이퍼 리얼리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법과 기술은 모든 메가 처치의 모범이 되었다.  Ⅲ. 교회 크기에 목매게 된 역사 (2) 메가처치 현상을 비판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로 세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옥성호 형제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쓴 마이클 호튼, 또 <신학실종>, <윤리실종> 등의 ‘실종’ 시리즈를 쓴 데이빗 웰즈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교회의 크기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의 일부 잘못된 면들만 비판함으로써 메가처치 현상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 한 가지, 이들의 공통점은 메가처치의 그릇된 현상이 몇몇 사람들의 신학적 오류 때문에 생겼다고 보며 그들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목당한 ‘희생양(?)’으로는 알미니우스, 찰스 피니, 빌리 선데이 등이며, 또 여기에 몇몇 교회성장학자나 세속적 심리학, 마케팅 기법 등도 이 목록에 단골로 올라가는 이름들이다. 이들 몇몇 사람들의 실수 때문에 오늘날 이 모든 끔찍한 문제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가처치 현상은 그들만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표자일 뿐이다. 메가처치 현상의 뿌리는 앞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의 노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동기, 뜨거운 열심,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름대로 선한 싸움을 싸웠지만, 이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부산물(by-product)과 부작용(side-effect)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들끼리 이리저리 결합해서 ‘괴물’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역사를 조금 더 추적해 보자. 1. 세계선교운동과 지상 명령 이데올로기 얼핏 보면 메가처치 현상과 세계선교운동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8세기 이후 개신교의 세계선교운동은 놀랍게도 메가처치 현상으로 나아가는 물꼬를 터 주었다. 세계선교운동은 심정적으로 선뜻 인정하기 싫지만 1, 2차 대부흥운동에서 메가처치 현상으로 나아가는 교량이며, 긴 우회로다. 그러니까 1, 2차 대부흥 운동 때 규모에 눈을 뜬 교회는 세계선교운동이라는 긴 우회로를 따라 메가처치 현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가. ‘지상명령’ 이데올로기 첫째로, 세계선교운동은 ‘지상명령’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지상명령이란 ‘땅 위(地上)’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높은 최고의(至上)’ 명령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신자와 교회가 올인(all-in)해야 하는 최고 명령이라는 뜻이다. 1, 2차 대각성운동가들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뒤 세계선교운동가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게 된다. 미묘한 강조점의 변화가 생겼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선교 명령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명령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과제들은 전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선교 명령을 도울 경우에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상명령 이데올로기다. 선교명령을 지상명령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취약하다. 성서는 최고의 명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선교 명령을 신자와 교회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으로 여겨졌던 적도 별로 없었다. 벌써 2-3세기 이후부터 교회는 선교명령이 벌써 성취되었다고 보기 시작했다. 루터와 칼빈만 하더라도 선교 명령은 1세기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교회는 선교 명령을 미완의 과제요, 더 나아가 지상 최고의 과업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도와 선교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그리하여 점차 선교 및 전도 운동은 ‘대약진 운동’이나 ‘천리마 운동’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신자와 교회는 앵무새처럼 이렇게 읊조린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오자. 강권하여 주의 집을 채우자.” 나. 목표의 구체화 둘째로, 세계선교운동은 교회와 신자가 올인(all-in)해야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공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나 ‘전도나 선교를 하는 것’ 등은 구체적인 목표라고 할 수 없다. 세계선교운동은 교회가 조금만 노력하면 금새 성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적절히 제공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땅 끝’이 바로 구체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사실 땅 끝이란 성경에도 나오는 용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되었다. 한 때 땅 끝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혹은 바다 끝 낭떠러지를 뜻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에게 땅 끝은 스페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증기선과 증기기차가 상용화된 19세기의 사람들에게 땅 끝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따라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러자 엄청난 효과가 나타났다. 신자와 교회가 여기에 올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고로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하는 법이다. 드와이트 무디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무디의 이 구호에는 바로 자신의 세대에 복음화가 가능하다는 놀라운 자신감과 뚜렷한 목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자신감과 목표의식이 유럽과 미국의 청년들을 선교에 올인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학생자원 선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일어났다. 이후 선교명령은 점차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즉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고, 역사를 종결시키며, 천국을 끌어내리는 종말론적 과업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 교회가 앉아만 있겠는가? 이 위대한 과업의 이름은 ‘세계 복음화’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서기 2000년까지 세계 복음화를 달성하자는 ‘AD2000 운동(AD2000 &Beyond Movement),’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자는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미완의 과업을 완수하자는 ‘과업완수운동(FTT: Finishing the Task)’ 등은 무디를 이은 ‘세계 복음화 운동’의 후예들이다. 전 세계 교회는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구체적인 목표 아래 하나가 되었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 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대회는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세계 복음화’라고 하는 단일 목표 아래 연합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제 전 세계 교회는 오로지 전도와 선교에 올인하게 되었다. 다.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활용 세계선교운동이 제공한 또 하나의 유산은 바로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활용이다.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기계, 전기, 통신, 방송 등의 테크놀로지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관이며,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와 태도요, 그리고 새로운 사유방식을 말한다. 테크놀로지란 ‘설정된 목표를 성취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의 활용’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테크놀로지가 20세기 이후의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냈다. 세계선교운동도 이 기술적 세계관에 물들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세계선교운동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자 이제 전 세계 교회는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데 전념하게 된다. 그리하여 20세기에 선교 전략의 폭발이 일어났다. 사실 수단과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현대 선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의무라고까지 했다. 이 내용이 ‘현대 선교 헌장’의 골자다. 웨슬리, 휫필드, 피니, 무디 등도 같은 관점이었다.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법의 적극적 활용은 19세기를 감리교도(Methodist)의 세기로, 20세기를 방법론자(Methodologist)의 세기로 만들었다. 온갖 종류의 선교전략이 만들어졌다. 10/40창, 미전도 종족 입양 운동, 관문도시 선교 전략, 전문인 선교 전략 등 군사 용어를 방불케 하는 온갖 용어와 전략 등이 난무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테크놀로지가 선교 영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들이 메가처치 현상의 예비적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테크놀로지는 기본적으로 목표 달성의 수단과 연관이 되어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첫째, 목표는 달성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 따라서 목표는 절대로 추상적이어서는 안 되며,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라야 한다. 따라서 전략의 기본 중의 기본은 ‘성취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은 제거하고 보이는 것만 골라내는 것이 목표 설정의 기술이다. 둘째로 목표는 집중되어야 한다. 단 하나의 목표만 세워야지 이것저것 여러 개의 목표를 세우면 안 된다. 셋째로 설정된 목표 이외의 나머지 목표는 배제하고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목표가 세워지면 이제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잠깐! 그에 앞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못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측정도구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수학과 통계학,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점차 전도와 선교는 과학이자 테크놀로지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메가처치 현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2.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과 교회성장학의 탄생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난 경위는 대략 이렇다. 먼저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영향을 받아 세계선교운동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계선교운동에서 교회성장학이 발생하고, 이것이 지역교회에 접목되면서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사람이 중요한데, 그는 세계선교운동의 귀한(?) 성과를 교회에 연결(link)시켜준 사람이다. 맥가브란은 인도 다모(Damoh)에서 인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그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왜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장하고,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가? 혹시 여기에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민 끝에 그는 교회 성장의 원리를 정리하여 1950년대 ‘교회성장학’이라는 기이한 학문을 창시하게 된다. 가. 새로운 목표, 교회성장 도널드 맥가브란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세계선교운동과 복음주의권 교회에 전혀 새로운 ‘목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 성장(church growth)’이다. 대각성 운동가들의 목표는 ‘영혼 구령’이었고, 초기 선교 운동가들의 목표는 ‘선교 명령의 순종’이었으며, 20세기 선교 운동가들의 목표는 ‘세계 복음화’였다. 그러던 것이 맥가브란에 와서는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맥가브란이 세계 복음화라는 목표 달성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측정 방법을 ‘교회 성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복음화가 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전략, 전술, 인원, 재정을 쏟아 붓더라도 종국에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그 모든 수고는 헛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는 전도의 목적을 ‘회심’이 아니라 ‘제자화’라고 천명했다. 무슨 말이냐면, 전도와 영혼구원만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결국 ‘불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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